http://www.ingopress.com/ArticleRead.aspx?idx=826 [클릭하시면 원문 및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민사회신문] 2007-08-20일
“그 길은 베풂이 아니라 배움이었다”
‘이주여성 친정나들이 프로젝트’ 동행기
명절만 되면 찾지 못하는 친정을 그리는 엄마들의 붉어진 눈시울을 기억하는가. 타국의 남편을 만나 기약하기 힘든 만남을 그리는 이주여성들은 오죽하겠는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고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실현시켜준 ‘NAL자!’ 프로젝트가 지난 1일부터 8일까지 한국여성재단과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삼성생명 주관으로 이뤄졌다. 사돈으로 엮어진 아시아의 가족애를 확인한 여정에 강경희 여성재단 사무총장이 동행해 기록으로 남겼다. /편집자
엄마의 고향 찾아 ‘NAL자!’
고생과 그리움의 작은 위로
“두 가족을 챙기는 여전사들”
#1. 드디어 친정을 향해 출발!
친정을 찾아 가는 먼 여정에 필리핀으로 떠나는 가족들은 아침 8시10분 비행기로, 베트남은 아침 10시50분 비행기로 각각 출발 예정이었다. 먼 지역에서는 하루 전날 서울에 도착하여 실무위에서 마련한 공항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공항으로 왔고, 몇 가족은 자정 가까이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라운지에서 밤을 보냈다.
이른 아침 6시경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필리핀으로 떠나는 가족들은 거의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고향을 떠난 후 그 긴 세월을 얼마나 큰 그리움을 키우며 참고 살아왔을 여성들의 얼굴은 대부분 상기되어 있었고, 그러는 중에도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들을 건사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고맙게도 인천국제공항에서 대가족의 입국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관계자가 새벽부터 나와 우리들의 출발을 점검하고 도와주었다.
이 사업을 가능하도록 지원해준 삼성생명의 서상웅 과장과 문화일보 천영식 차장도 이번 여행에 동행하기로 하여 일찍부터 공항에 나와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여수MBC의 기자, 리포터, PD 역시 이른 시간부터 공항의 가족들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새롭게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다문화가족들에 대한 지원사업의 보다 깊이 있는 평가를 위하여 한양대 여성연구소 심영희 교수도 연구원과 함께 이 여행에 동행하기로 하였다.
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은 하루 전날 공항 근처 숙소에서 머물면서 출발 전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하면서 차례차례 도착하는 가족들을 맞이하였고, 새벽 3시가 넘도록 출국신고서를 일일이 쓰는 작업을 하여 거의 눈도 붙이지 못하고 공항으로 나왔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과 배려, 땀과 노력 덕분에 드디어 마닐라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었다.
#2. 마닐라 니노이아키노 국제공항 도착 풍경
일기가 고르지 못하여 염려하였으나 비행은 순조로웠고 아이들이 많이 탔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소란 한번 없이 4시간에 가까운 비행 끝에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라운지로 나와 그 긴 세월 그리움에 목말라하던 가족들의 상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눈물이 쏟아졌고 여기저기 얼싸안고 떨어지지 못하는 가족들이 보였다.
104명의 가족들은 그 길로 친정으로 함께 돌아가 4박5일간 머물며 밀린 회포를 풀고 5일에 마닐라호텔로 돌아오도록 일정을 계획하였다. 가슴 찡한 상봉 후 가족들은 고향을 향하여 각각 출발하였고 우리 일행은 마닐라에서 1시간가량 걸리는 지역에 친정이 있는 빌라누에방 씨의 가족들을 따라 잠시 그들의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모든 가족들이 거의 다 떠나도록 빌라누에방 씨를 마중 나온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여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도착 후 두 시간이 넘도록 찾지 못하여 그냥 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빌라누에방 씨의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 되었다. ‘아, 아니구나. 무언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일정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 식구들을 찾아보자 하였다. 안도의 숨과 함께 환해진 빌라누에방 씨는 잠시 후에 한 무리의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언니들, 동생과 심지어는 어머니의 친구 분까지 함께 마중 나왔다. 그냥 집으로 갔다면 빈집이 우리를 맞이할 뻔하였다. 가족 모두와 동네 어르신까지 함께 마중 나온 것이다.
어느 가족은 아예 봉고차를 대절하여 플래카드에 “Welcome Lee's Family"라는 문구를 새겨 차 앞에 붙이고 마중 나온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필리핀의 문화였다. 여전히 대가족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사랑과 정이 가득한 가족문화! 그래서 그냥 집으로 가자는 제안에 빌라누에방 씨는 울음을 터뜨릴 뻔 했던 것이었다.
빌라누에방 씨의 집은 조용하고 작은 동네 한 쪽에 있었다. 슬래브로 지붕을 얹었고 퇴색 된 벽 칠이 오랜 기간 살아 온 집임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도착은 바로 동네잔치의 시작이었다. 여러 가지의 음식들이 나왔고 공항에서 만났던 친지들보다 더 많은 수의 얼굴들이 반갑게 작은 집으로 찾아들었다. 이 분들의 그 길었던 헤어짐의 시간을 위로하고 반가움을 나누게 될 상봉의 시간을 오래 방해할 수 없어서 가족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참 고우시던 어머니께 인사드린 후 우리 일행은 마닐라 호텔로 돌아왔다.
#3. 가족이 모두 모였다
전날 밤 실무회의를 하면서 우리 실무진들 모두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지…. 혹여 단 한 가족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남편과 아이들만 돌아오는 가족이 생기면 어쩌나, 민다나오 지역의 가족을 따라 간 여수MBC 일행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너무도 많은 염려와 걱정으로 가슴이 조여지는 것만 같았더랬다. 특히 민다나오는 모슬림 지역으로 반군들의 활동도 활발하여 최근에도 외국인 선교사가 한명 납치돼 그 선교사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민간인과 군인 등 모두 11명이 희생되었다고 했다. 언론이 따라갔으니 큰 카메라와 피부색이 다른 MBC팀은 눈에 잘 띄었을 터인데. 필리핀주재 한국대사관에서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늦은 아침 무렵부터 가족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여 밤 10시26분 경, 104명의 가족 모두가 도착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이후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가 많은 염려를 했던 여수MBC팀은 특별한 체험을 하고 왔다. 가족들의 상봉을 촬영하면서 너무나 가난한 친정의 상황에 마음이 쓰여 여수MBC팀은 세탁기를 하나 선물하기로 하고 역 터미널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세탁기를 샀다고 했다. 이들이 역 터미널을 떠나고 약 5분 후에 누군가가 버스에 폭탄을 장치하여 터뜨려 터미널의 일부가 폭파되었고 4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 폭발의 시간에 우리 일행들이 없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으나 등에 식은땀이 흐르게 하는 이 나라의 현실 한 편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족들이 친정식구들과 함께 마닐라로 왔다. 그 중 몇 가족은 근처에서 머물면서 가족들이 떠나는 날 공항까지 함께 배웅하러 나온다고 했다. 많은 가족들이 호텔방에 대하여 재차 확인하는 질문이 있었다. “정말 우리 가족끼리 한 방 쓰는 거 맞아요?” 이 질문이 우리 실무진들의 마음을 많이 무너뜨렸다. 제대로 된 신혼여행조차도 해보지 못했을 이들에게 호화스러운 호텔의 방 하나가 온전히 한 가족들에게 제공된다는 것이 믿기 어려운,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었던 것.
우리 사회의 양극화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새삼 가슴으로 느끼게 만드는 질문이 오래도록 가슴을 찌른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104명의 가족 모두가 마닐라로 돌아왔다. 그 밤은 우리 실무진들이 필리핀에 들어와 처음으로 편한 잠에 들 수 있었다.
#4. 친정방문 소감 나누기
다음 날,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퀴즈로 워밍업을 하고 아이들은 따로 방을 마련하여 만화동영상을 보도록 했다. 너무 어려 엄마와 떨어지기 어려워하는 아이들만 함께 데리고 그룹프로그램을 통하여 친정방문의 소감을 함께 나누었다.
나도 다섯 부부와 함께 그룹프로그램을 진행하였는데 그 중 아이비 씨는 많은 질문에 답을 하려다가 울음으로 대신하였다. 너무도 목이 메어 답을 하려다가는 그만 남편에게 쓰러져 울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내용도 모르면서 그룹의 대부분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말도 시작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내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남편도 눈물을 흘리면서 대신 답을 해주었다. “아이비는 마음이 많이 여려요. 한국에서도 늘 친정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 처가에 가서 힘들게 사시는 부모님을 뵙고 아직 철이 없어 부모님을 돌보지 못하는 두 동생들 때문에 많이 속상해 했어요. 우리도 살기 힘든데, 왜 자꾸 친정에 돈을 부치자고 하는지 이해 못했는데, 와서 보니 정말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더 열심히 살아서 처가를 더 도와야겠어요….”
또 한 분의 남편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정말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이런 여행을 어떻게 하겠어요. 이번에 도와주셔서 아내의 친정을 방문하여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디 제 뒤로도 후배 남편들에게 이런 기회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우리 농촌은 너무 어렵게 사는 가정이 많이 있어요. 도움을 주지 않으면 친정방문을 생각도 할 수 없는 가족이 많은데, 이런 사업이 계속되어 더 많은 가족들에게 좋은 기회 생기기를 바랍니다.”
오전 내내 많은 사람들을 걱정하게 했던 결혼한 지 11년 되는 부부가 있었다. 심한 다툼 끝에 아내는 한국에 안돌아가겠다고 했고 남편은 다시는 필리핀에 오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말이 오고갔던, 그 부부가 내 그룹에 함께 있었다. 다행히 부인이 대학교육까지 받아 영어로 표현이 자유로운 경우여서 11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픈 사연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언어소통이 자유롭지 못하여 본의 아니게 남편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사연이 남편에게 전해졌고 남편 또한 아내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사를 전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처럼 아픈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11년을 견뎠을까…. 이 부부는 쌓여있던 서로의 사연을 나누는 것으로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렸다. 그 아픈 사연이 이 부부에게만 있을 리 만무한데 우리 다문화가족들의 마음 안에 얼마나 많은 응어리들이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5. 104명 가족들의 문화체험
출발하기 전 날인 8월 7일, ‘팍상한’이라는 명소를 104명 가족 모두 함께 관광하였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엄마&아내의 나라가 지닌 아름다운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획된 프로그램이었다. 아름다운 계곡에 배를 끌고 올라가 폭포수를 맞으면서 1시간 가량 계곡을 즐기고 급류에 실려 다시 내려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명소였다.
배를 타기에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계곡 아래에 있는 수영장에서 우리 젊은 활동가 몇이 함께 헤엄치며 물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어느 사이 우리 활동가들을 많이 따랐다. 피곤하지만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던 친정방문 마지막 날은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6. 아우성과 같았던 출국 전 폭우
밤새 하늘이 무너지듯 비가 쏟아졌고 무서운 굉음을 동반한 심한 바람이 불었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도 잠에 들기 어려운 이상스런 일기변화에 또 한 번 맘을 졸여야 했던 밤이었다. 그런데 그 쏟아지는 비와 무서운 굉음의 바람이 왜 그리 특별히 느껴지는지…. 그 비는 그 밤, 잠들지 못하고 있을 필리핀 여성들의 가슴에서부터 쏟아지는 눈물과도 같았고 무서운 굉음의 바람소리는 소통하기 어려워 마음에 묻어두었던 그 많은 이야기를 미친 듯 외치는 그 여성들의 아우성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여성들의 아픈 사연이 너무도 아파서 하늘이 대신 쏟아내는 눈물과 아우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우리 필리핀 여성들이 실제로 그 만큼 크게 소리 내어 외치고 그만큼의 눈물을 쏟아낼 수 있다면 응어리진 마음의 상처들이 모두 치유될 것만 같았다. 거짓말처럼 아침에는 날이 개었고 부슬부슬 비는 내렸으나 우리 대가족은 예정대로 한국을 향한 비행기에 탑승했다.
처음 이 사업을 계획할 때부터 가장 염려했던 것이 단 한명의 이주여성이라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이었고 여행하는 동안 내내 실무진에서 가장 예민하게 걱정했던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여행에 참여한 이주여성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염려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이 여성들은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 가족들의 가난탈출을 위하여 서독으로 간호사를 지원해서 떠났던 우리 선배여성들과 같은 여전사들이었다.
필리핀에 있는 친정 식구들을 위하여, 한국에 새롭게 꾸린 가족들을 위하여 하루 24시간 소처럼 일하면서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두 가족들을 섬기는 여전사들. 이들 중 누구라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한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치졸하고 못난 것 이었는지. 이번 여행을 통하여 함께 참여했던 각계 관계자들 모두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크기만큼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가 있다. 이 사업은 오랜 기간 친정에 가보지 못한 이주여성들과 가족들에게 상봉의 기회를 마련해준 지원 사업이 아니었다. 그토록 오랜 기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소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외로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두 가족을 지켜온 여성들과 그 가족들의 삶을 함께 성찰하면서 그 동안 간과해온 우리들의, 우리 사회의 책임과 역할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지원 사업이었다.
우리는 베푼 것이 아니라 베풂을 받았다. 그것도 너무나 아프고 무거운 삶의 여정을 보여줌을 통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