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재단과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이 응원하는 2014 희망날개 윙크페스티벌이 10월26일(일) 오후 1시 나루아트센터에서 열립니다. 다문화여성들의 요리와 전시, 체험프로그램과 공연 등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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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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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장학생 김수영 씨(가명. 27세)를 만났다. 봄빛장학금은 성매매로 생활하던 여성들에게 대학교 학비를 지원하여 그 생활을 벗어나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장학금으로 한국여성재단이 지원하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장학금이 있지만 탈성매매 여성을 위한 장학금은 거의 없다. 소녀 가장, 돌봐줄 어른이 없는 청소년 등은 누구나 아무런 의심 없이,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탈성매매 여성에 이르면 모두들 생각이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런 일을 해야 했는가? 방종하거나 유혹에 약하거나 윤리의식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 여성들을 대학에 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가? 하는 식의 생각들을 잠깐씩 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조금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거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지극히 평범한 태도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는 순간, 단번에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그냥 내 동생이나 내 친구인 것이다. 그녀들이 했던 일들은 그냥 많은 불행한 사연들, 인생에서 우리 자신도 저질렀던 좋지 않은 선택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대단한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인 것이다.

 

그녀, 김수영은 14세 때부터 청소년 쉼터에서 생활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지만, 도저히 ‘그 집에서 함께 살 수는 없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가족관계의 문제가 더 컸다. 쉼터는 20여명 정도가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학교 교육과정도 함께 진행하는 곳이어서 오후 4시까지는 검정고시나 여러 자격증을 위해 꼼짝없이 앉아서 공부해야 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더구나 부모가 있음에도 쉼터에서 살아야 하는 사정을 가진 소녀에게는 마음 붙이기 힘든 곳이었다. 당시에 그녀는 쉼터 생활을 답답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재정상의 이유로 쉼터가 폐쇄된 후, 다른 성인 공동체 생활을 모색하는 대신, 그냥 혼자 살기로 결정한 데는 아마도 청소년기에 경험한 ‘답답함’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쨌든 그 쉼터에서 자그마치 5년이나 살았고, 선생님들께 소소하게 반항하는 것으로 답답한 마음을 풀곤 했던 ‘소녀’ 김수영은 쉼터 폐쇄와 동시에 19살 먹은 ‘성인’ 김수영이 되어 당장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생활비는커녕 당장 잘 곳도 마땅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그저 열심히 일하면 생활이야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자신감만 있었다. 당장 일자리가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 나이 때의 젊은이들이 흔히 하듯 인터넷 접속을 통해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못했어요. 얼마나 위험한지, 유혹이 많은지 몰랐어요. 쉼터에서만 생활하다가 나왔으니. 제대로 된 성교육도 없었고. 그냥 PC방에 가서 채팅을 했어요. 일자리를 구하는 내용으로요. 그랬더니 아가씨를 구한대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땐 정확히 몰랐어요. 당장 머물 곳도 없다고 대답하니까 그냥 택시타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택시비를 자기네가 내준다고. 대구에서 통영까지 택시를 타고 갔어요. 그 택시비가 첫 번째 빚이 된 거죠. 그 당시에는 세상 물정을 몰랐어요.

 

그렇게 첫 발을 디딘 후, ‘죽도록 기억하기 싫은’ 생활을 3년이나 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앳된 젊은이로서는, 도저히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무섭기만 했다. 빚을 갚아야 할 것 같았고, 경찰도 업소와 한편인 것 같이 느껴졌다. 도망가면 곧 다시 잡혀 섬으로 팔려갈 것도 같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협박했다.


가끔, 그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그 일을 택했느냐? 네가 좋아 선택한 것이 아니었느냐? 편하게 돈 벌려던 것 아니었느냐? 등의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질문이 슬프고 억울하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도 묻는다고 한다. 공장이나 식당 같은 건전한(?) 곳이 아닌, 그곳을 택한 이유를. 그리고 사슬로 묶어 놓은 것도 아닌데, 그곳에 묶여 있었던 이유를.

무슨 명쾌한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저 잘 곳도 마땅한 보호자도 없는 19살 먹은 여자에게는 그것이 가장 가까이 있는 일이었을 뿐.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 사회가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권하고 있는 일일뿐.


다만, 왜 바로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에, 그녀는 짧지만 분명하게 설명했다. 일단 그 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다른 방식으로 사는 방법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계속 빚을 지게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쪽 세상의 시스템 속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 들어가면서 나중에는 밖의 세상이 두려워진다고 했다. 이를테면 욕을 섞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는 곳에서 살다보면, 세상 밖의 사람들과는 대화조차 꺼려질 정도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일반적인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듣는 나로서는, 과연 그럴까, 실감나지 않는 말이긴 하지만 다른 여성에게서도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던 터라, 그 입장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것대로의 사정이 있겠지, 짐작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한 3년간 그곳에서 살았는데,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때 일을 잘 기억을 못해요. 얼마 전에 어떤 외국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는데, 정말 다 잊어서 제대로 말도 못했어요. 너무 괴로워서 제가 살기 위해 잊은 거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함께 일하던 나이 든 언니들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고 결심을 굳게 했어요. 그렇게 비참하고 추하게 나이 드는 게 제 미래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해서.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믿을 만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 여인숙으로 도망 다니며 숨어 살았고, 업주들이 잡으러 올까봐 한동안은 멀리서 ‘다마스 차’만 보면 기겁해서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한때는 답답하게만 생각했던 쉼터로 연락이 닿았다. 그녀가 자란 곳은 아니었지만, 쉼터의 선생님들이 자신의 보호자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 후, 성인 쉼터에서 살면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기 위해 직업훈련학교를 다녔다. 거기서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고, 아이는 지금 친할머니가 키우고 있다.

 

아이 키우고 살림하고 공부하고 가끔 일도 하며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시험 때가 되면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 에요. 밤잠이 없는 아기를 돌보느라 밤을 꼬박 새고 아침에는 시험을 보러 가야 하니까요. 틈틈이 시험공부를 하고, 실습이라도 있을 때면 거의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로 며칠을 보내기도 했어요. 아이 아빠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본인도 힘들었겠죠.

 

직업훈련학교 선생님들, 쉼터에서 만나는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그녀에게 공부를 더 해보라고, 대학에 가라고 권유를 많이 했다고 한다.

 

옛날에도 공부는 잘 했어요. 검정고시 성적도 좋고. 공부하는 게 싫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일반적인 세상’에서 생활비를 벌며 사는 것이 목표였던 그녀에게는 버겁기만 한 권유였다. 그녀는 솔직히 말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회복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는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돈을 모으고 방을 얻고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그녀로서는 대학교 학비를 마련하는 일이 너무 막막했다는 것이다. 대학에 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마도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꿈을 좇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꿈만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었는데,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정말 좋았어요. 신선하기도 했고요. 읽은 책이 많지 않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준 책이에요.

 

선생님들이 자꾸 권하고, 저도 뭔가 확실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나도 대학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저는 인복이 있나 봐요. 제가 무언가 하겠다고 결심하면 도와주는 분들이 꼭 생겨요.

저한테 봄빛장학금도 그런 것이에요. 제 형편으로는 사이버대학교 학비도 큰 부담이 돼요. 일반 대학보다는 싸지만, 그래도 큰돈이잖아요. 장학금을 받지 않았더라면 대학 공부는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학기 당 80만원 가까운 장학금을 받는데, 그것으로 학비를 충당하고, 모자라는 것과 생활비와 용돈은 일해서 벌고 있어요. 제 수입만 가지고는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이 장학금이 없었으면 공부를 중단했겠지요.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결심하니 장학금이 주어진 기분을 이해하실 수 있어요? 정말 기뻤습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기회가 온 거잖아요.

 

어렵게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학비 마련을 위해 이리 저리 알아보던 중, 봄빛장학금을 알게 되고 장학생에 선정이 된 것이 그녀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모 사이버대학 4학년으로 사회복지학과 상담심리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쉼터 선생님들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듯, 자신도 후배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사회복지학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상담소에서 일하면서 상담심리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겪었던 일, 자신이 당했던 고통,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들, 이런 것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겠다. 자신의 과거를 재해석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만들어 갈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대학 공부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위한 길인 동시에, 자신의 인생 자체를 다시 해석하고 자신을 새롭게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지난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청소년들을 돕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들려주는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에 그녀의 인터넷 상담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복수전공을 계속 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남들과 똑같은 기회를 가지고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이미 이룬 그녀를 보았다.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은 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상담자가 될 것이다. 이미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으로 하나의 전범이 되고 있으니, 언젠가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 자신이 받은 것을 세상에 갚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수영 씨는 봄빛장학금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부를 마칠 때까지 안정적으로 지급되는 점이 가장 좋다고 했다. 중간에 장학금이 끊기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하는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큰 장점이라는 것이다.

다만 국가 장학금을 함께 받는 경우, 학비 부족분만 봄빛에서 지급하기 때문에 실제 지급액이 턱없이 적어지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탈성매매 여성의 경우, 저소득 계층이 많아 국가장학금을 받는 경우가 많으니, 이 부분은 적절한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수영 씨는 서른이 되는 내년, 대학을 졸업하는 내년에는 한없이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했다. 공부를 하던, 일을 하던, 사람을 만나던, 그냥 놀던,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좀처럼 하기 힘든 말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 같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남들과 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 자체가 ‘성공’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 같았다는 말이다.

그녀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게 될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들과 같은 기회를 얻어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면서, 남들과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그녀가 어두운 터널 속에서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는 것 말이다. 봄빛 장학금은 그녀에게 그 시간을 주었다.

 

 

 

 

정영훈 (작가)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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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문화기획자이자 생산자로 자라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를 만들어 함께 성장하고 있는 이주여성들이 그들입니다. '2014 희망날개' 프로젝트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나답게’ ‘우리 함께자라나고 있는 그들의 활동과 성장 이야기를 전합니다.

 

 

 

 

  

희망을 지속시키는 힘, 난민여성 커뮤니티맘쉐프

문화다양성을 위한 다문화여성 문화커뮤니티 지원희망날개

 

 

‘맘쉐프’는 올해 처음 희망날개 프로젝트 지원을 받는 커뮤니티로 국제난민과 탈북난민을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피난처에서 만난 여성난민들의 모임이다. '맘쉐프'는 난민여성과 일반인 참가자가 함께하는 시민참여 난민 요리 워크숍을 지난 7월부터 코트디부아르 등 6개국의 난민여성들이 돌아가며 고국의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8 21일의 요리선생님은 2006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온 요안나(가명)씨다.

 

 

춤과 노래로 하나 되어

학교 봉사동아리, 페이스북 또는 지인들을 통해 소식을 접한 고등학생, 직장인, 대학생, 주부들로 가득 찬 강의실. ‘피난처박지현 간사가맘쉐프콩고를 소개하며 요리워크숍의 문을 연다.  이어 한국과 콩고 양국 국기가 그려진 연두색 고깔모자를 쓴 요안나 씨와 남편이 강의실 중앙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까만색 티셔츠와 호피무늬 치마를 입고, 팔에는 하얀색 토시를 발목과 가슴부분에는 직접 만든 하얀색 술 장식을 두르고 있다. ‘두두둥두~’ 북소리가 깔린 아프리카 음악에 맞춰 그녀의 남편은 노래를,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지켜보고 있던 참가자들도 하나 둘 음악에 맞춰 그녀를 따라하다 리듬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아프리카 예 예 예로 이어지는 중독성 있는 후렴구를 따라 부른다. 강의실 안이 금방 즐거운 에너지로 가득 채워진다.

 

 

 

 

서로 다가가 어우러지다

참가자들이 자리에 앉아 가빠진 숨을 고르는 동안 요안나 씨가 미리 만들어 놓은 콩고의 전통요리잉가이잉가이(NgaiNgai)’를 소개한다. “뼈를 제거한 생선살에 양파와 토마토, 콩고에서 나는잉가이잉가이라는 허브를 넣어서 삶은 요리입니다. 한국의 김치 같아요.” 그녀의 남편이 돌아다니며잉가이잉가이잎을 보여준다. 직접 만져보고 맛을 보라고 권한다. 맛이 강하지 않고 약간 새콤하다. 콩고에서 가져온 씨앗을 올해 라이트하우스 앞마당에 심었는데 잘 자랐단다.

본격적인 요리 실습이 시작된다. 요안나 씨의 설명과 요리시범에 집중해 참가자들이 야채를 썰고 닭을 튀기고 소스를 만드는 동안 치킨과 양배추, 토마토에 레몬양파소스를 곁들인 오늘의 요리 마데수(Madesu)가 완성된다. 요안나 씨는 앞에, 참가자들은 각자의 자리에 서서 시작된 요리워크숍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모이고 흩어지고 섞이며 어우러졌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참가자들이 요리를 배우기 위해 요안나 씨 곁으로 다가가고, 그녀가 참가자들을 돕기 위해 조리대를 순례하며 번갈아 서로에게 다가가는 광경은 마치 두 문화가 만나 풍부해지는 변화의 과정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한 참가자는어떤 요리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요안나 씨에게 집중하고 의지해서 요리가 완성되잖아요.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고 좋았어요.”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마데수가 완성되자 요안나 씨가 미리 준비한 밥, 잉가이잉가이, 콩고의 콩 요리인 살라디아 소소(Saladia Soso)를 접시에 담아 나눠준다. 요안나씨가 나눠 준 요리와 자신들이 완성한 요리를 예쁘게 차려놓은 후 함께 맛을 본다. 서로 먹여주고 이야기를 나누며 맛보는 사이 접시가 싹싹 비워진다. “콩고음식은 처음인데 의외로 괜찮았어요.” “다 맛있어요.” 디저트 미까띠(Mikate)까지. 오늘의 만찬이 풍성하게 마무리됐다.

 

 

삶의 활력을 드린 것 같아요

‘맘쉐프’는 토요일마다 열리는피난처난민학교에 참여하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에서 출발했다. 2011년에 모임이 결성된 후 지난 3년 동안 특별한 이름없이 평범한 난민여성 커뮤니티였으나, 올해희망날개 프로젝트에 지원하면서맘쉐프라는 이름도 가지게 되고 시민참여 난민요리 워크숍도 열게 되었다. 워크숍 이외에 서울 시내 장터에서 아프리카 음식도 판매하고 요리책도 만들 계획이다.

 

 

 

- ‘희망날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난민여성분들에게 일어난 변화가 있었나요?

- 박지현 간사: 처음 회의를 1시간하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2시간 넘게 했어요. 굉장히 자발적으로 이야기하시고 능동적으로 참여하셨어요. 그런 모습 처음 봤어요. 무슬림가정은 여성분들 발언권이 좀 적어요. 평상시 말씀하시는 것을 거의 못 봤는데, 한번 얘기해보세요 했더니 방언이 터지신 거예요(웃음).

 

 

자기 차례에 앞서 먼저 열리는 요리워크숍에 참여해 보조를 하고 싶다는 난민 여성도 있었고, 의상에 대한 논의가 없었는데 요안나 씨처럼 알아서 다들 전통의상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난민여성들 안에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고 능력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박지현 간사는 말한다.

‘맘쉐프’의 요리워크숍은 녹록치 않은 요안나 씨와 난민 여성들의 한국생활에 경제적인 면에서도 큰 희망을 주고 있다. 얼마 안 되는 강사료지만 최선을 다해 일한 보상이 여전히 불안정한 난민가족의 삶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올해 10월 열릴 예정인 다문화여성들의 축제 윙크페스티벌에서는 지금까지 했던 요리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해 선보일 예정이다. 전통의상, , 음악 등을 이용해 어떻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계속 고민 중이란다.

 

 

콩고의 춤과 문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뻐요

요안나 씨는 정부를 비판하는 노래를 부른 남편이 2006년 콩고내전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어 콩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콩고 춤과 요리를 소개한 것은 지난 워크숍이 처음이다.

 

 

 

 

- 지난 요리워크숍 굉장했어요.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요안나 씨는 어땠나요?

- 요안나 : 콩고 춤과 요리를 통해서 한국 사람들과 같이 저의 문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저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 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책임감을 느꼈던 것도 좋았고요.

 

요리워크숍을 준비하면서 의상을 만들고 함께할 콩고요리를 고르고 어떻게 설명할지 등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책임감이 주어지고 그렇게 할 수 있어서 강해진 것 같다고 덧붙인다. 그녀는 이야기 도중 강해진다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는데, 강해진다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 ‘강해진다(strong)’는 말을 계속 하셨는데,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요?

- 요안나 : 강해지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만약 강하지 않으면 힘도 없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생각할 수도 알 수도 없어요. 희망은 꼭 있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우울해져요.

 

 

모이면 힘이 되고, 아름다워 보여요

문화기획자과정 첫 수업시간에 열정적인 모습으로 참가하던 요안나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문화기획자과정에서 그녀가 보고 배운 것은 무엇일까?

 

- 문화기획자과정에 계속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나요?

- 요안나 : 다른 여성들의 경험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문화기획자 과정을 통해서 서로가 마음을 열 수 있었고 여자들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나는 가진 게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함께 모이면 그것이 힘이 되고, 밖에서 보면 아주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콩고 의상과 춤으로 지난 워크숍을 알차게 준비한 것도 그곳에서 전통춤을 추는 중국과 필리핀 이주여성들을 만나면서 받은 영감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이주여성들과 함께해서 즐거웠지만 각기 다른 언어 때문에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서 아쉬웠다고, 그래서 요즘 한국어 수업에 더 열심히 참가하고 있단다.




 

난민이 되는 과정과 현재의 어려움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녀의 눈시울이 콩고에 두고 온 네 명의 아이들에 대해 말하는 순간 붉어지고 아련해진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막내와 콩고에 두고 온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걱정이라는 그녀의 눈에 엄마의 슬픔과 아픔이 묻어난다.

 

- 현재 가장 큰 바람이 뭐예요?

- 요안나 : 지금의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쭉 갈 수 있도록 약해지지 않는 것이 지금의 가장 큰 바람이에요. (이런 희망을 유지하는데) ‘맘쉐프활동이 많은 도움이 되요.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다는 담대한 그녀의 말이 커다란 울림이 되어 전해진다.

 

 

<맘쉐프 난민요리 워크숍 모습(영상제공: 피난처)>

 

 

 

이선혜  줌마네 인터뷰작가 과정으로 글쓰기를 시작, 삶을 투영하는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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