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청운동 주택가에서 만난 [민들레회]. 언뜻 보기에는 여느 이층집 주택과 다르지 않은 이곳 [뿌리의집]에 아이를 입양 보낸 가족들의 모임인 [민들레회]가 자리 잡고 있다. 현관 옆으로 난 널찍한 유리문 안쪽이 [민들레회]와 [뿌리의집]의 사무국 공간이다. [뿌리의집]은 고국을 찾은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이자 시민단체인데 1년 전부터 사무실을 나누어 [민들레회]와 함께 쓰고 있다.
우리만의 공간에서 함께하는 공간으로
이날 [민들레회] 교육실에서는 조금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해외입양의 당사자인 세 명의 ‘사람책’(사람의 인생을 좋은 책에 비유한 말)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다. 이곳엔 서울여대, 외국어대 등의 대학생 50여명이 함께했다.
"사람들은 입양이 아이에게 더 나은 교육과 풍요로운 환경을 제공하는 기회라고 말해요. 하지만 그건 환상일 뿐이에요. 입양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와 환경에서 친부모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아이의 권리를 빼앗는 거예요.”
생후 12개월에 미국인에게 입양이 된 후 성장하는 내내 불안과 심리적, 언어적 폭력을 겪었다는 로라. 그녀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런 환상을 반드시 깨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노금주 어머니는 가족들이 엄마인 그녀 몰래 아이를 입양 보낸 이야기를 전했다. 30년 만에 만난 아들 이야기에 담당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소문 끝에 겨우 아이를 만났는데…. 새로운 아픔이 시작되더라구요. 말도 통하지 않고 아이는 어렵게 살고….”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고 했다.
이야기는 이날 이 자리에서 세대와 성별을 넘어 서로의 마음을 울리고 공감 받을 수 있었다.
얼마 전의 [민들레회]였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간이나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공간은 힘이 세다
[민들레회]의 교육장과 사무실은 반지하 주차장과 창고를 변경해서 사용해 왔다. 그러니 항상 어둡고 눅눅해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낮은 천장에는 배선이 보이고 수납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래 사용해서 글자를 지우기가 힘든 화이트보드를 포함해서 사무실 집기들도 낡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민들레회] 회원들에게는 소중하고 감사한 공간이었다. 아이를 입양 보낸 부모, 특히 엄마들은 ‘아이를 버린 엄마’라는 사회적 편견과 죄책감 때문에 평생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그만큼 모임에 활성화되기 힘들지만, 그만큼 함께 모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절실했다.
[민들레회] 사무실은 회원들에게 자신을 들어낼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공간이었다. 노금주 어머니처럼 지방에 살면서 [민들레회]를 찾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몇몇 회원들은 매주 모여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언젠가 만날 아이와 말이 통하고 싶어서 시작한 영어공부는 자식같은 해외입양인들이 도와주고 있다.
교육장은 이렇게 공부도 하고,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곳이었다. 이 공간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과 교육실 풍경은 언제나 어수선했다. “하루는 입양 보낸 딸을 찾고 싶다고 사무실에 오신 어머니가 한마디도 못하시고 계속 울기만 하신 적이 있어요. 책이 잔뜩 쌓여있고 어둡고 칙칙한 사무실이 그 어머니에게 편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들레회] 최형숙 사무국장은 그때부터 보다 편안하고 쾌적한 공간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꿈은 이루어졌다.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과 한국여성재단이 지원하는 여성단체 시설개선사업을 통해서였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낮은 자리
지원을 받은 것이었지만, [민들레회] 스스로 계획하고 지원서를 제출하고 추진해서 공간을 멋지게 변화시키면서 회원들은 해내었다는 성취감과 주인의식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뿌리의집]에 너무 감사하면서도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곤 했거든요. 이제는 저희 [민들레회]도 이 공간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마음 편하고 당당해졌어요. 공간이 뭐라고…, 공간이 달라지니 힘이 생기네요. " 지금 [민들레회]는 새로운 공간을 알리고 자축하는 개소식 준비가 한창이다. 교육실에는 뜻 깊은 이름도 지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낮은 자리’. 이름의 의미는 [뿌리의집] 원장인 김도현 목사에게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정부도 시민들도 입양이 주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아야 해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번영은 수많은 입양가족의 고통을 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 사과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이 낮은 자리에서 그런 사회인식을 바꾸는 힘이 생기길 바래요.”
처음 자기만의 공간이 생겼을 때 [민들레회]는 거기서 얻은 힘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입양특례법 재개정 공청회에 참가하고 2013년 ‘싱글맘의 날’ 행사를 주관하고, ‘사람책’으로 나설 수 용기도 이 공간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용기로 이제 자신들의 공간을 더욱 밝고 건강하게 바꾸어냈다.
앞으로 이곳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 취재와 글 / 고곰세(줌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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