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멘토링은 지금부터 시작!

2014 희망멘토링 수료식

 

 

정성스럽게 땋은 머리, 가장 아끼는 옷을 입고 왔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했지만 오늘은 하나도 졸립지 않습니다.

멘토 선생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습니다.

 

 

 

꽃피는 봄에 만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발대식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014 희망멘토링 수료식입니다.  

멘토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써왔다며 행사장 문 앞을 서성거리는 멘티부터 수료식 당일 갑작스런 출장을 서둘러 마치고 부랴부랴 참석했다는 멘토까지, 멘토와 멘티가 마지막으로 함께 모인 수료식에는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합니다. 

 

지난 8개월간 멘토 · 멘티가 서로 나누었던 이야기와 추억을 나누는 시간인만큼 한국여성재단 조형 이사장과 LG이노텍 김희전 상무도 함께 참석하여 따뜻한 환영사와 아낌없는 축사로 멘토 · 멘티를 격려합니다.

 

 

 

'생일에는 언제나 함께했던, 그래서 더욱 즐거웠던' 서울.

'멘토와 멘티의 꿈을 찾는 추억이야기가 한가득'이었던 구미.

'닮은꼴 멘토·멘티가 난생 처음 야구장도 가고 농구도 하면서 으쓱으쓱 꿈을 찾아갔던' 광주.

'맨날 맨날 보고싶어서 토요일밤마다 단체카톡방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안산.

'의사, 유치원 선생님, 자동차 디자이너 등 멘토와 함께 토의를 해서 링처럼 꿈을 끼웠다'는 오산.

'의리의리한 멘토와 함께 토요일, 일요일 링가링가 노래가 나올 정도로 재미있게 함께했던파주까지.

그동안의 멘토링 활동을 노래로, 오행시로 표현하며 어느새 얼굴 가득 웃음꽃이 핀 멘토와 멘티.

 

 

 

지금까지 함께했던 활동을 고스란히 담은 앨범을 교환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더 많이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과 '함께하며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고마웠던 마음을 나누며 END가 아닌 AND를 약속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프로그램 "협동화 만들기"

위 아래를 바꿔봐도, 옆으로 돌려봐도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었던 조각 하나 하나가 모여 처음 만났던 멘토 · 멘티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어색하고 낯설었던 시작을 지나 함께해서 더 행복한 마지막.

멘토와 함께했던 추억을 바탕으로 더욱 성장해나갈 멘티와 멘티의 가능성을 믿고 앞으로도 응원해줄 멘토가 있기에 2014 희망멘토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LG이노텍 임직원과 함께하는 다문화가정 자녀 1:1 멘토링 사업 희망멘토링LG이노텍 후원으로 2010년에 시작하여 올해로 5회째 맞이하는 사업으로, LG이노텍 임직원들이 직접 1:1멘토가 되어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꿈과 비전을 찾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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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그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나눠요

다문화 아동 외가방문 지원사업 최종보고회






코 끝에 겨울이 찾아왔던 지난 11월 23일,  "2014 다문화 아동 외가방문 지원사업"에 참가했던 가족들이 한자리서 다시 만났습니다.


삼성생명과 생명공헌위원회의 후원으로 8년째 진행되고 있는 " 다문화 아동 외가방문 지원사업"에는 올해 총 20가족이 선정되어 엄마의 나라 "베트남"을 다녀왔습니다. 방문 이후 최종보고회를 통해 오랫만에 만난 가족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와 추억, 그리고 감사함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여성재단 조형 이사장은  "아이들이 외가 방문을 통해 외가에 친숙해지고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며 다문화 자녀로서 글로벌 리더로 성장해 나갈 수 있길 바란다"며 따뜻한 환영사로 참가 가족들을 격려했습니다.



5년만에 고향을 방문했다며 부모님을 생각하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내에게 "내년에 꼭 다시 가자"며 약속하는 남편. "쌀국수가 너무 맛있었다"며 또 가고 싶다고 배시시 웃는 아이.  베트남 방문을 통해 멀게만 느껴졌던 아이와 가까워져서 뜻 깊은 여행이었다는 엄마. 처가 식구들에게 "사랑해요"라며 영상 편지를 띄우는 가족 등 20가족 저마다의 사연들을 나누는 동안 베트남 여행의 추억은 점점 무르익어갔습니다.


아이들 모두 너나 할것 없이 큰 목소리로 한국 동요와 베트남 동요를 따라부르며 함께하다보니 어느덧 마칠 시간.


"다문화 아동 외가방문 지원사업"을 통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며 끈끈한 가족의 정을 쌓을 수 있었다는 가족들의 표정에는 아쉬움보다는 앞으로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더 가득해보였습니다.



외가에서의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들이 올 한해 함께한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길 바라며 2015년에도 많은 다문화가정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사업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베트남 외가 방문이 가져다 준 선물     

 

                                         부티항님 (다문화아동 외가방문 지원사업 참가 가족)

 

 

제가 한국에 온 지 7년 넘었고 그동안 베트남에도 갔다 온 적도 있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한 번도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함께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20014년에 들어와서 큰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였고 곧 군대도 가게 되는데 엄마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저에게 늘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중간 생략) … 짧은 기간이었지만 저에게 정말 의미 깊은 여행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아이들과 많은 것들을 경험함으로써 아이들과 조금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베트남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너무 짧은 기간이어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하나가 있습니다. 평소에 베트남어를 알아듣기만 하고 전혀 구사하지 못했던 막내아들이 베트남에 갔다 온 후에 베트남어를 조금씩 하게 되었던 것은 정말 놀랍고 이로인해 제가 아들에게 베트남어를 계속 가르쳐야 된다는 원동력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문화 아동 외가 방문 지원사업을 통하여 저희 가족은 더욱 더 서로를 이해하며 배려하는 기회가 되었고 저와 아이들의 관계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막내아들의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데에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외가의 정, 잊지 못할 추억     

 

                                           류준모  (다문화 아동 외가방문 지원사업 참가 가족)

 

 이 땅에 살고 있는 많은 다문화가정이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아이들의 외가를 방문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거의 모든 경비를 부담해주시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소중한 추억과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간 생략) … 아이들에게 외가는 말이 통하지 않고 낯선 환경으로 어색했지만, 외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외가 친척들과 교감을 나누면서 외가의 뿌리를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끼리 금방 친해져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대화의 전부였지만 지내는 동안 즐거워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더 없이 소중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온(베트남 전통 배)도 타보고, 해먹에서 낮잠도 즐겨보고, 친척들의 집을 방문해서 푸짐한 대접도 받으면서 외가의 정을 흠뻑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중간 생략) 이번 여행을 통해서 베트남 아내에 대한 배려와 아이들에게 외가의 정을 느끼게 해주고, 전문가 선생님들까지 동행해서 아이들을 케어해주신 점 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감동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으로 가족들의 추억이 하나 만들어졌고, 한국인 남편들에게는 어깨에 지고 있던 큰 짐을 덜어주신 셈이 되었습니다.



 


 

다문화아동 외가방문 지원사업은 삼성생명과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의 후원으로 시작하여 올해로 8년째를 맞이하는 사업입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에게 외가 방문 문화체험을 통해 글로벌 리더로서의 성장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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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씨(가명. 42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단체를 먼저 소개하고 싶어 했다. 그곳은 탈성매매 여성을 위해 상담, 법률지원, 의료 지원, 자활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진희 씨는 거기서 탈성매매 여성들에게 퀼트 만들기와 재봉틀 바느질을 전담하여 가르치며 그녀들의 자립을 돕고 있었다.

 

‘공방’이라는 팻말이 걸린 방, 한쪽 벽에는 갖가지 색깔 고운 실패들이 촘촘히 걸려 있고, 다양한 질감의 천들이 쌓여 있었다. 나란히 놓인 재봉틀 앞에 앉아 무언가 만들고 있는 수강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모여 바느질을 하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풍경이 틀림없었다.

누구나 원한다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풍경, 그러나 아마도 이 여성들은 오랫동안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풍경이 아니었을까.

 

김진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고 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아해서, 학교를 체육특기생으로 다녔다. 운동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중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그녀의 학교 시절은 배움도, 친구도, 추억도 없는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았다.

 

행복은 여러 가지 모습이지만, 불행은 한 가지 모습을 갖고 있다고 했던가. 그녀의 가정 역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성매매 생활로 밀어 넣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무턱대고 시작한 생활이었다. 아무도 그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청소년기였다. 세상은 몰랐지만,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만은 알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녀는 15년가량 그 생활을 계속했다. 여러 종류의 업종을 전전했다. 새로운 업종으로 옮길 때마다 빚이 늘어갔다.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불’을 쓰고 있었다. 그 밖에 온갖 불합리한 업계의 규정들을 불합리한 줄도 모르고 지켜야 했다. 고통을 참아가며 일을 계속 했지만, 돈은 벌지 못했고, 몸은 망가졌고, 나날이 무는 이자는 계속 늘어갔다.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갈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 ‘몸’으로 일을 하는데 번 돈은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고 느꼈고, 이 세계를 벗어나야 착취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업소 주인들과 연결된 ‘조직’ 사람들이 무서웠지만, 어느 날 기회를 틈 타, 무조건 몸만 도망 나왔다. 그리고 주민 등록도 없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 혼자 은둔하는 생활을 3년이나 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쫓아올까 두려워 월세 방, 여관을 전전하며 숨어 살았다.

 

당시에는 공권력이나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담센터에서 법률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오랜 은둔 도망자 생활 끝에 겨우 한 상담센터를 소개 받았고, 그 센터는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그것이 약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경찰을 믿지 못했어요. 업소와 연결이 되어 있는 걸 많이 봤거든요. 그러니 업소에서 도망 나와 쫓기는 동안 경찰에 신고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무조건 숨어 지내면서 잠깐씩 최저생계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만 했지요. 당장 누군가가 붙잡아서 다시 팔아 버릴 것 같고, 단속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바로 멈추는 것 같고,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업소 주인들은 여성들이 도망가면 당장 쫓아와 잡지는 않는다는 말도 들었어요. ‘언젠가는 주민등록증을 만들겠지, 언젠가는 결혼을 하겠지.......’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린대요. 그러다가 자기네가 필요할 때 잡아들인다는 거예요. 잡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당장 잡기도 한다고 하고. 아무튼 저는 잔뜩 겁을 먹고 죽은 듯이 숨어서 살았어요.

언젠가는 ‘성매매와의 전쟁’을 하겠다는 여자 경찰서장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기에 ‘저 사람은 나를 보호해주겠다’ 싶어서 그 경찰서에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전화 받는 직원이 굉장히 사무적인 거예요. 나는 당장 죽을 것처럼 무서운데 내 사정은 모르고 그냥 업무 처리하듯이 통화를 하더라고요. 지금이라면 다 이해하지만, 그때만 해도 세상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을 때라서, 결국 다시 숨었죠.”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람도 있다는 것, 순수하게 나를 돕는 사람도 있다는 것,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오랜 고통의 시간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바로 지금 그녀가 일하는 곳이, 그녀에게 새 인생을 살라고 손 내밀어 준 상담센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일터를 먼저 소개하고자 했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바느질을 배우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몇 년 뒤, 자기가 교사가 되어 후배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결혼도 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편과 힘을 합쳐 건강한 가정을 꾸려가며 새롭게 인생을 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그녀는 무사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 오는 후배들 보면, ‘미래를 생각해라, 계획을 짜라, 지난 번 그 일은 잘 진행되고 있니?’, 하는 식으로 자꾸 잔소리를 하게 돼요. 후배들의 어려운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해주고 무조건 말을 다 들어주고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저는 자꾸만 채찍질을 하게 돼요.

사실 후배들에게는 이 상담단체 쉼터 생활이 편할 거예요. 여기서는 따뜻하게 배려를 받거든요. 그렇지만 사회에 나가면 그렇지 않잖아요. 당장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고요.

그러니 여기서 자격증 하나라도 제대로 따놓고, 자기 앞 날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훈련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사회에 나가자마자 다시 부적응 상태가 됩니다. 지금 제도로는 3년 정도 여기서 보호받으며 훈련 받을 수 있는데, 그게 긴 것 같아도, 짧아요. 우리들이 세상에 적응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녀는 ‘사회성’을 기르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업소 같은 곳에 갇혀있다시피 살면서 그곳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을 그냥 받기만 하며 살다보니(물론 그건 그냥이 아니라 엄청난 고리의 이자로 선불한 것이지만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대중교통 이용하는 법이나, 길 찾는 법, 시장에서 물건 사는 일조차 서툴러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배우지 못해, 때와 장소, 사람에 맞게 인사하고 대화하는 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각자가 극복해야할 심리적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작은 일들도 일일이 배우고 느껴야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자활 훈련기간 동안 부지런히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여성들은 의지력이 부족하고 세상에 대해 겁을 먹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자활훈련이 끝나고 나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틈이 생기면 다시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후배들의 어려움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자꾸 간섭하고 채찍질 하게 되는 것은 인생을 다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 같은 ‘당사자 활동가’(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이 반성매매활동을 하는 경우)의 심정이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든든한 선배였다. 이 여성들의 깊은 사정을 다 알고 있고, 개인이 감당해야할 과제를 철저하게 챙기면서 동시에 성매매문제를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직접 겪으며 몸으로 깨달은 선배인 것이다.

그녀가 대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몸으로 느낀 필요’ 때문이었다.

 

“제가 중 고등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일이 없었잖아요. 저는 체육특기생이었으니까 매일 운동만 했거든요. 원래 공부에 취미도 없고, 한 적도 없었어요. 그러니 대학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어요.

여기 센터에 처음 취직했을 때도 고졸이었어요. 원래 대학졸업 이상만 취직 할 수 있는데, 저는 ‘당사자’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채용이 된 거거든요. 여기 상담하러 오는 분들하고 같은 처지였던 사람이니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로.

그런데 여기서 일하다 보니, 공부가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뭘 알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아주 절실하게 들었어요. 후배들 상담해 주다 보니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앞을 멀리 내다보고 싶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고 싶고, 저는 복지라는 단어도 제대로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 사회복지가 무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고.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데도 또 한편으로는 손가락질하고 빼앗아 가는 사회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어요. 알아야 한다, 배워야 한다는 마음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는 거 에요.

그래서 일단 무조건 질렀어요. 대학 입학 원서를 낸 거예요. 사회복지학을 전공으로. 그런데 등록금을 보니, 아무리 사이버대학이라 해도 제가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포기를 했어요. 입학은 했는데,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졸업은 포기를 한 거예요.”

 

그러다가 봄빛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기뻤다고 했다. 그토록 원했던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아마 그녀에게 이 돈은 평생에 가장 ‘큰 돈’이었지 싶다. 더구나 열심히 공부를 계속하는 한 장학금이 중도에 끊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니,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며 상담센터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어서 그녀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일이었다.

 

“여성 재단은, 일일이 묻지 않아요. 그게 좋아요. 물론 후원하는 분들의 입장을 잘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첨부해라’ 이런 요구를 하는 곳도 있거든요. 우리 사정을 잘 모르시는 거지요. 그런데 여성 재단은 자세히 캐묻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자격심사와 사후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을 존중해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여성 재단이 고맙다고 했다.

그렇겠다. 도움 받는 사람의 인격, 후원 받는 사람의 자존감, 그런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 때로는 후원금의 액수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후배들에게 역할모델이 되고 있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후배를 위해 자리를 터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심하기도 하고, 센터 사업의 새 영역 개척을 계획하기도 하고, 효과적인 잔소리 방법을 고민하기도 하고.......

한 마디로 그녀의 고민은 싱싱하고 건강했다. 그것은,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자기 손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지는 심플하고도 싱싱한 고민이었다.

 

“세상이 정말 달라졌어요. 요즘 어린 친구들 상담 왔을 때 들어보면, 돈이 계기가 아닌 경우가 많아요. 부모와의 갈등, 외로움, 좋은 브랜드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이 많아요. 특히 외로움이 큰 이유예요.

그리고 요새는 유혹당하기가 너무 쉬워요. 사회 환경이 그래요. 길가에 전단지도 많고요, 아르바이트라고 광고 내는 것들 중에 이상한 것도 많고요. 그러니까 애들이 많이 노출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더 많아 질 거 같아요. 알바라는 형식으로 파트타임처럼 도우미 하는 것도 늘어날 거고.

결국 이 일이 여기저기 다 갈취당하다가 끝나는 일이라는 것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알아야 하는데, 막상 어린 애들은 모르니까 이런 단체를 찾지 않고, 시간이 지나서야 이런 곳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그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세요?”

 

진희 씨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1주일에 한 번씩 현장(유흥가)에 나간다고 했다. 성매매여성들에게 안내문도 돌리고, 기초적인 법률 지식도 알려주고, 상담센터의 전화번호도 가르쳐주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고 했다. 그것이 그녀가 세상의 이중성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들을, 이 생활에 빠져들도록 유혹해 놓고는 뒤에서는 손가락질하는 이중성이 싫다고 했다. 아무리 쉬지 않고 이 일을 해도 결국에는 ‘다 갈취당하는 구조’를 이 어린 애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비록 그 애들은 아직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말이다.

 

당사자활동가 김진희 씨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 공부였다. 세상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방법을 가르친 것도 공부였다. 공부가 왜 그토록 필요했었는지를 오늘처럼 절실하게 들은 날이 얼마나 있었던가. 봄빛 장학금은 그녀의 절실함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고마움을 세상을 향해 갚고 있었다.

 

재봉틀 돌아가는 ‘드르륵’ 소리가 평화롭게 들렸다. 머리를 맞대어 바느질에 골몰하는 모습도 평화로웠다. 오늘 이들이 누리는 이 평화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한 사람이 고통 중에 홀로 극복해내던 눈물의 시간, 그 사람에게 손 내밀고 기꺼이 도와준 사람들의 따뜻한 시간, 인격을 존중하는 돈으로 후원해준 사람들의 속 깊은 시간, 그런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진정한 평화의 시간 아닌가 말이다.

 

 

 

 

정영훈 (작가)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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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재단에서는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와 교보생명 후원으로 <2014년 양육미혼모 모자가정 긴급의료비 지원사업>을 실시합니다.


<2014년 양육미혼모 모자가정 긴급의료비 지원사업>은 건강 보호 사각지대에 놓인 양육미혼모 및 자녀들 중 긴급하게 치료를 요하는 질환에 대해 의료비를 지원함으로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1. 사업개요

1) 사업추진기간 : 2014년 9월~2014년 12월(수시 접수)

※ 본 사업은 수시지원사업으로 지원금 소진 시 2014년 12월 이내에 종료될 수 있습니다.


2) 지원대상 : 양육미혼모 및 그 자녀

※ <2014년 양육미혼모 모자가정 건강지원사업(종합건강검진)>에 참여한 대상자도 지원 가능


3) 지원내용

① 지원내용

   - 급성질환의 치료, 수술비 지원

    : 임신, 출산 및 양육의 과정에서 긴급하게 치료를 요하는 대상자 의료비 지원

    : <양육미혼모 모자가정 건강지원사업(종합건강검진)> 참여자 중 긴급하게 치료를 요하는

       대상자 의료비 지원

  ※ 지원불가내용  - 6개월 이상의 치료를 요하는 질환의 경우 지원 불가

                                 - 치과질환 지원 불가

   

② 지원한도액 : 사례당 최대 300만원 이내



2. 사업진행과정

1) 지원절차

개인(지원자) : 개인 직접 추천은 불가함. 추천단체(시설)을 통해 지원.


추천단체(시설) : 지역사회에서 여성지원 사업 및 복지활동을 수행하는 단체 및 시설로 지원금의 집행 관리 및 사례관리가 가능한 곳 (예 : 여성단체 및 시민사회 단체, 자활훈련기관, 복지 관련 기관 등)에서만 추천 가능.

※ 지원불가 단체 : 의료 시설(병원 내 사회사업팀 등) 및 관공서 소속 단체 지원불가


개인

추천단체와 상담

추천

단체

서류 준비 및 신청,

치료 종료 후 결과보고

한국여성

재단

지원여부 알림,

지원금 지급 및 사례관리

지원여부 알림, 지정병원 안내

지원금 지급


2) 지원사업 추진도


서류

접수

서류심사

선정발표

치료

및 사례관리

결과보고

의료비

지원

수시



수시



수시



선정 직후

치료계획에 따른

치료 진행

치료 종료 후 15일 이내


결과보고서 및

증빙서류

검토 후

의료비 지원


3) 선정발표

- 선정사례 해당 추천단체 개별 연락

※ 사업 선정 발표 일시는 해당 월 일정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지원사업 특이사항

지원금은 결과보고서 제출 후 추천단체에 지급되는 ‘후지급’ 방식입니다.

② 신청금액은 조정될 수 있으며, 동일한 질환으로 타 기관(정부 포함)의 지원을 받는 경우는 선정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③ 지원 선정일로부터 타당한 이유 없이 1개월 이내에 치료를 시작하지 않은 경우 선정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제출된 서류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4. 신청방법

1) 제출방법

접수기간 : 2014년 8월 ~ 12월(* 수시 접수)

접수방법 : 우편 접수


2) 제출서류

※ 접수 서류가 모두 구비되어야만 심사대상이 됩니다.

구분

세부내용

① 공문

※ 첨부파일 서식 활용

② 추천단체(시설)의 지원신청서

③ 의료기관의 진단서 또는 치료계획서

진단명, 치료기간, 치료방법, 비용이 명확히 제시된 서류로 발급받으시길 바랍니다.

④ 가족관계증명서

※ 한부모가족증명서로 대체 가능

⑤ 국민기초생활수급자증명서

또는 건강보험료 납입증명서

⑥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동의서

※ 첨부파일 서식 활용

⑦ 단체소개서 및 단체등록증

※ 단체소개서 첨부파일 서식 활용


3) 접수처

① 우편접수

- (121-541)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5길 13 한국여성재단빌딩 5층 지원사업팀 (김수현 앞)


문의

- Tel. (02)336-6385 (한국여성재단 지원사업팀 김수현)



5. 별첨서식

※ 하단의 첨부파일 참조

① 추천단체(시설) 지원신청서

②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동의서

③ 단체소개서



[첨부파일] 양육미혼모 모자가정 긴급의료비 지원사업 서식


(서식)2014_건강지원사업_긴급의료비지원사업.hwp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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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장학생 김수영 씨(가명. 27세)를 만났다. 봄빛장학금은 성매매로 생활하던 여성들에게 대학교 학비를 지원하여 그 생활을 벗어나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장학금으로 한국여성재단이 지원하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장학금이 있지만 탈성매매 여성을 위한 장학금은 거의 없다. 소녀 가장, 돌봐줄 어른이 없는 청소년 등은 누구나 아무런 의심 없이,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탈성매매 여성에 이르면 모두들 생각이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그런 일을 해야 했는가? 방종하거나 유혹에 약하거나 윤리의식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 여성들을 대학에 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가? 하는 식의 생각들을 잠깐씩 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조금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거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지극히 평범한 태도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는 순간, 단번에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그냥 내 동생이나 내 친구인 것이다. 그녀들이 했던 일들은 그냥 많은 불행한 사연들, 인생에서 우리 자신도 저질렀던 좋지 않은 선택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대단한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인 것이다.

 

그녀, 김수영은 14세 때부터 청소년 쉼터에서 생활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지만, 도저히 ‘그 집에서 함께 살 수는 없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가족관계의 문제가 더 컸다. 쉼터는 20여명 정도가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학교 교육과정도 함께 진행하는 곳이어서 오후 4시까지는 검정고시나 여러 자격증을 위해 꼼짝없이 앉아서 공부해야 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더구나 부모가 있음에도 쉼터에서 살아야 하는 사정을 가진 소녀에게는 마음 붙이기 힘든 곳이었다. 당시에 그녀는 쉼터 생활을 답답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재정상의 이유로 쉼터가 폐쇄된 후, 다른 성인 공동체 생활을 모색하는 대신, 그냥 혼자 살기로 결정한 데는 아마도 청소년기에 경험한 ‘답답함’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어쨌든 그 쉼터에서 자그마치 5년이나 살았고, 선생님들께 소소하게 반항하는 것으로 답답한 마음을 풀곤 했던 ‘소녀’ 김수영은 쉼터 폐쇄와 동시에 19살 먹은 ‘성인’ 김수영이 되어 당장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생활비는커녕 당장 잘 곳도 마땅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그저 열심히 일하면 생활이야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자신감만 있었다. 당장 일자리가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 나이 때의 젊은이들이 흔히 하듯 인터넷 접속을 통해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못했어요. 얼마나 위험한지, 유혹이 많은지 몰랐어요. 쉼터에서만 생활하다가 나왔으니. 제대로 된 성교육도 없었고. 그냥 PC방에 가서 채팅을 했어요. 일자리를 구하는 내용으로요. 그랬더니 아가씨를 구한대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땐 정확히 몰랐어요. 당장 머물 곳도 없다고 대답하니까 그냥 택시타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택시비를 자기네가 내준다고. 대구에서 통영까지 택시를 타고 갔어요. 그 택시비가 첫 번째 빚이 된 거죠. 그 당시에는 세상 물정을 몰랐어요.

 

그렇게 첫 발을 디딘 후, ‘죽도록 기억하기 싫은’ 생활을 3년이나 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앳된 젊은이로서는, 도저히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무섭기만 했다. 빚을 갚아야 할 것 같았고, 경찰도 업소와 한편인 것 같이 느껴졌다. 도망가면 곧 다시 잡혀 섬으로 팔려갈 것도 같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협박했다.


가끔, 그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그 일을 택했느냐? 네가 좋아 선택한 것이 아니었느냐? 편하게 돈 벌려던 것 아니었느냐? 등의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질문이 슬프고 억울하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도 묻는다고 한다. 공장이나 식당 같은 건전한(?) 곳이 아닌, 그곳을 택한 이유를. 그리고 사슬로 묶어 놓은 것도 아닌데, 그곳에 묶여 있었던 이유를.

무슨 명쾌한 이유가 있었겠는가? 그저 잘 곳도 마땅한 보호자도 없는 19살 먹은 여자에게는 그것이 가장 가까이 있는 일이었을 뿐.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 사회가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권하고 있는 일일뿐.


다만, 왜 바로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에, 그녀는 짧지만 분명하게 설명했다. 일단 그 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다른 방식으로 사는 방법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계속 빚을 지게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쪽 세상의 시스템 속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 들어가면서 나중에는 밖의 세상이 두려워진다고 했다. 이를테면 욕을 섞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는 곳에서 살다보면, 세상 밖의 사람들과는 대화조차 꺼려질 정도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일반적인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듣는 나로서는, 과연 그럴까, 실감나지 않는 말이긴 하지만 다른 여성에게서도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던 터라, 그 입장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것대로의 사정이 있겠지, 짐작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출구가 보이지 않던 그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한 3년간 그곳에서 살았는데,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때 일을 잘 기억을 못해요. 얼마 전에 어떤 외국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는데, 정말 다 잊어서 제대로 말도 못했어요. 너무 괴로워서 제가 살기 위해 잊은 거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함께 일하던 나이 든 언니들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고 결심을 굳게 했어요. 그렇게 비참하고 추하게 나이 드는 게 제 미래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해서.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믿을 만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 여인숙으로 도망 다니며 숨어 살았고, 업주들이 잡으러 올까봐 한동안은 멀리서 ‘다마스 차’만 보면 기겁해서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한때는 답답하게만 생각했던 쉼터로 연락이 닿았다. 그녀가 자란 곳은 아니었지만, 쉼터의 선생님들이 자신의 보호자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 후, 성인 쉼터에서 살면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기 위해 직업훈련학교를 다녔다. 거기서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고, 아이는 지금 친할머니가 키우고 있다.

 

아이 키우고 살림하고 공부하고 가끔 일도 하며 사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시험 때가 되면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 에요. 밤잠이 없는 아기를 돌보느라 밤을 꼬박 새고 아침에는 시험을 보러 가야 하니까요. 틈틈이 시험공부를 하고, 실습이라도 있을 때면 거의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로 며칠을 보내기도 했어요. 아이 아빠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본인도 힘들었겠죠.

 

직업훈련학교 선생님들, 쉼터에서 만나는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그녀에게 공부를 더 해보라고, 대학에 가라고 권유를 많이 했다고 한다.

 

옛날에도 공부는 잘 했어요. 검정고시 성적도 좋고. 공부하는 게 싫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일반적인 세상’에서 생활비를 벌며 사는 것이 목표였던 그녀에게는 버겁기만 한 권유였다. 그녀는 솔직히 말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회복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는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돈을 모으고 방을 얻고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그녀로서는 대학교 학비를 마련하는 일이 너무 막막했다는 것이다. 대학에 간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마도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꿈을 좇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꿈만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었는데,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정말 좋았어요. 신선하기도 했고요. 읽은 책이 많지 않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준 책이에요.

 

선생님들이 자꾸 권하고, 저도 뭔가 확실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나도 대학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저는 인복이 있나 봐요. 제가 무언가 하겠다고 결심하면 도와주는 분들이 꼭 생겨요.

저한테 봄빛장학금도 그런 것이에요. 제 형편으로는 사이버대학교 학비도 큰 부담이 돼요. 일반 대학보다는 싸지만, 그래도 큰돈이잖아요. 장학금을 받지 않았더라면 대학 공부는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학기 당 80만원 가까운 장학금을 받는데, 그것으로 학비를 충당하고, 모자라는 것과 생활비와 용돈은 일해서 벌고 있어요. 제 수입만 가지고는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이 장학금이 없었으면 공부를 중단했겠지요.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결심하니 장학금이 주어진 기분을 이해하실 수 있어요? 정말 기뻤습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기회가 온 거잖아요.

 

어렵게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학비 마련을 위해 이리 저리 알아보던 중, 봄빛장학금을 알게 되고 장학생에 선정이 된 것이 그녀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모 사이버대학 4학년으로 사회복지학과 상담심리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쉼터 선생님들이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듯, 자신도 후배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사회복지학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상담소에서 일하면서 상담심리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겪었던 일, 자신이 당했던 고통,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들, 이런 것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겠다. 자신의 과거를 재해석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만들어 갈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대학 공부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위한 길인 동시에, 자신의 인생 자체를 다시 해석하고 자신을 새롭게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의 지난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청소년들을 돕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들려주는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에 그녀의 인터넷 상담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복수전공을 계속 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남들과 똑같은 기회를 가지고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이미 이룬 그녀를 보았다.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은 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상담자가 될 것이다. 이미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으로 하나의 전범이 되고 있으니, 언젠가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 자신이 받은 것을 세상에 갚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수영 씨는 봄빛장학금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부를 마칠 때까지 안정적으로 지급되는 점이 가장 좋다고 했다. 중간에 장학금이 끊기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하는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큰 장점이라는 것이다.

다만 국가 장학금을 함께 받는 경우, 학비 부족분만 봄빛에서 지급하기 때문에 실제 지급액이 턱없이 적어지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탈성매매 여성의 경우, 저소득 계층이 많아 국가장학금을 받는 경우가 많으니, 이 부분은 적절한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수영 씨는 서른이 되는 내년, 대학을 졸업하는 내년에는 한없이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했다. 공부를 하던, 일을 하던, 사람을 만나던, 그냥 놀던,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좀처럼 하기 힘든 말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 같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남들과 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 자체가 ‘성공’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 같았다는 말이다.

그녀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게 될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들과 같은 기회를 얻어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면서, 남들과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그녀가 어두운 터널 속에서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는 것 말이다. 봄빛 장학금은 그녀에게 그 시간을 주었다.

 

 

 

 

정영훈 (작가)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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