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씨(가명. 42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단체를 먼저 소개하고 싶어 했다. 그곳은 탈성매매 여성을 위해 상담, 법률지원, 의료 지원, 자활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진희 씨는 거기서 탈성매매 여성들에게 퀼트 만들기와 재봉틀 바느질을 전담하여 가르치며 그녀들의 자립을 돕고 있었다.

 

‘공방’이라는 팻말이 걸린 방, 한쪽 벽에는 갖가지 색깔 고운 실패들이 촘촘히 걸려 있고, 다양한 질감의 천들이 쌓여 있었다. 나란히 놓인 재봉틀 앞에 앉아 무언가 만들고 있는 수강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모여 바느질을 하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풍경이 틀림없었다.

누구나 원한다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풍경, 그러나 아마도 이 여성들은 오랫동안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풍경이 아니었을까.

 

김진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고 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아해서, 학교를 체육특기생으로 다녔다. 운동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중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그녀의 학교 시절은 배움도, 친구도, 추억도 없는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았다.

 

행복은 여러 가지 모습이지만, 불행은 한 가지 모습을 갖고 있다고 했던가. 그녀의 가정 역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성매매 생활로 밀어 넣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무턱대고 시작한 생활이었다. 아무도 그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청소년기였다. 세상은 몰랐지만,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만은 알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녀는 15년가량 그 생활을 계속했다. 여러 종류의 업종을 전전했다. 새로운 업종으로 옮길 때마다 빚이 늘어갔다.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불’을 쓰고 있었다. 그 밖에 온갖 불합리한 업계의 규정들을 불합리한 줄도 모르고 지켜야 했다. 고통을 참아가며 일을 계속 했지만, 돈은 벌지 못했고, 몸은 망가졌고, 나날이 무는 이자는 계속 늘어갔다.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갈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 ‘몸’으로 일을 하는데 번 돈은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고 느꼈고, 이 세계를 벗어나야 착취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업소 주인들과 연결된 ‘조직’ 사람들이 무서웠지만, 어느 날 기회를 틈 타, 무조건 몸만 도망 나왔다. 그리고 주민 등록도 없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 혼자 은둔하는 생활을 3년이나 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쫓아올까 두려워 월세 방, 여관을 전전하며 숨어 살았다.

 

당시에는 공권력이나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담센터에서 법률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오랜 은둔 도망자 생활 끝에 겨우 한 상담센터를 소개 받았고, 그 센터는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그것이 약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경찰을 믿지 못했어요. 업소와 연결이 되어 있는 걸 많이 봤거든요. 그러니 업소에서 도망 나와 쫓기는 동안 경찰에 신고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무조건 숨어 지내면서 잠깐씩 최저생계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만 했지요. 당장 누군가가 붙잡아서 다시 팔아 버릴 것 같고, 단속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바로 멈추는 것 같고,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업소 주인들은 여성들이 도망가면 당장 쫓아와 잡지는 않는다는 말도 들었어요. ‘언젠가는 주민등록증을 만들겠지, 언젠가는 결혼을 하겠지.......’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린대요. 그러다가 자기네가 필요할 때 잡아들인다는 거예요. 잡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당장 잡기도 한다고 하고. 아무튼 저는 잔뜩 겁을 먹고 죽은 듯이 숨어서 살았어요.

언젠가는 ‘성매매와의 전쟁’을 하겠다는 여자 경찰서장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기에 ‘저 사람은 나를 보호해주겠다’ 싶어서 그 경찰서에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전화 받는 직원이 굉장히 사무적인 거예요. 나는 당장 죽을 것처럼 무서운데 내 사정은 모르고 그냥 업무 처리하듯이 통화를 하더라고요. 지금이라면 다 이해하지만, 그때만 해도 세상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을 때라서, 결국 다시 숨었죠.”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람도 있다는 것, 순수하게 나를 돕는 사람도 있다는 것,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오랜 고통의 시간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바로 지금 그녀가 일하는 곳이, 그녀에게 새 인생을 살라고 손 내밀어 준 상담센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일터를 먼저 소개하고자 했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바느질을 배우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몇 년 뒤, 자기가 교사가 되어 후배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결혼도 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편과 힘을 합쳐 건강한 가정을 꾸려가며 새롭게 인생을 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그녀는 무사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 오는 후배들 보면, ‘미래를 생각해라, 계획을 짜라, 지난 번 그 일은 잘 진행되고 있니?’, 하는 식으로 자꾸 잔소리를 하게 돼요. 후배들의 어려운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해주고 무조건 말을 다 들어주고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저는 자꾸만 채찍질을 하게 돼요.

사실 후배들에게는 이 상담단체 쉼터 생활이 편할 거예요. 여기서는 따뜻하게 배려를 받거든요. 그렇지만 사회에 나가면 그렇지 않잖아요. 당장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고요.

그러니 여기서 자격증 하나라도 제대로 따놓고, 자기 앞 날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훈련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사회에 나가자마자 다시 부적응 상태가 됩니다. 지금 제도로는 3년 정도 여기서 보호받으며 훈련 받을 수 있는데, 그게 긴 것 같아도, 짧아요. 우리들이 세상에 적응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녀는 ‘사회성’을 기르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업소 같은 곳에 갇혀있다시피 살면서 그곳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을 그냥 받기만 하며 살다보니(물론 그건 그냥이 아니라 엄청난 고리의 이자로 선불한 것이지만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대중교통 이용하는 법이나, 길 찾는 법, 시장에서 물건 사는 일조차 서툴러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배우지 못해, 때와 장소, 사람에 맞게 인사하고 대화하는 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각자가 극복해야할 심리적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작은 일들도 일일이 배우고 느껴야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자활 훈련기간 동안 부지런히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여성들은 의지력이 부족하고 세상에 대해 겁을 먹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자활훈련이 끝나고 나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틈이 생기면 다시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후배들의 어려움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자꾸 간섭하고 채찍질 하게 되는 것은 인생을 다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 같은 ‘당사자 활동가’(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이 반성매매활동을 하는 경우)의 심정이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든든한 선배였다. 이 여성들의 깊은 사정을 다 알고 있고, 개인이 감당해야할 과제를 철저하게 챙기면서 동시에 성매매문제를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직접 겪으며 몸으로 깨달은 선배인 것이다.

그녀가 대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몸으로 느낀 필요’ 때문이었다.

 

“제가 중 고등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일이 없었잖아요. 저는 체육특기생이었으니까 매일 운동만 했거든요. 원래 공부에 취미도 없고, 한 적도 없었어요. 그러니 대학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어요.

여기 센터에 처음 취직했을 때도 고졸이었어요. 원래 대학졸업 이상만 취직 할 수 있는데, 저는 ‘당사자’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채용이 된 거거든요. 여기 상담하러 오는 분들하고 같은 처지였던 사람이니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로.

그런데 여기서 일하다 보니, 공부가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뭘 알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아주 절실하게 들었어요. 후배들 상담해 주다 보니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앞을 멀리 내다보고 싶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고 싶고, 저는 복지라는 단어도 제대로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 사회복지가 무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고.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데도 또 한편으로는 손가락질하고 빼앗아 가는 사회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어요. 알아야 한다, 배워야 한다는 마음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는 거 에요.

그래서 일단 무조건 질렀어요. 대학 입학 원서를 낸 거예요. 사회복지학을 전공으로. 그런데 등록금을 보니, 아무리 사이버대학이라 해도 제가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포기를 했어요. 입학은 했는데,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졸업은 포기를 한 거예요.”

 

그러다가 봄빛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기뻤다고 했다. 그토록 원했던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아마 그녀에게 이 돈은 평생에 가장 ‘큰 돈’이었지 싶다. 더구나 열심히 공부를 계속하는 한 장학금이 중도에 끊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니,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며 상담센터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어서 그녀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일이었다.

 

“여성 재단은, 일일이 묻지 않아요. 그게 좋아요. 물론 후원하는 분들의 입장을 잘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첨부해라’ 이런 요구를 하는 곳도 있거든요. 우리 사정을 잘 모르시는 거지요. 그런데 여성 재단은 자세히 캐묻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자격심사와 사후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을 존중해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여성 재단이 고맙다고 했다.

그렇겠다. 도움 받는 사람의 인격, 후원 받는 사람의 자존감, 그런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 때로는 후원금의 액수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후배들에게 역할모델이 되고 있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후배를 위해 자리를 터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심하기도 하고, 센터 사업의 새 영역 개척을 계획하기도 하고, 효과적인 잔소리 방법을 고민하기도 하고.......

한 마디로 그녀의 고민은 싱싱하고 건강했다. 그것은,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자기 손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지는 심플하고도 싱싱한 고민이었다.

 

“세상이 정말 달라졌어요. 요즘 어린 친구들 상담 왔을 때 들어보면, 돈이 계기가 아닌 경우가 많아요. 부모와의 갈등, 외로움, 좋은 브랜드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이 많아요. 특히 외로움이 큰 이유예요.

그리고 요새는 유혹당하기가 너무 쉬워요. 사회 환경이 그래요. 길가에 전단지도 많고요, 아르바이트라고 광고 내는 것들 중에 이상한 것도 많고요. 그러니까 애들이 많이 노출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더 많아 질 거 같아요. 알바라는 형식으로 파트타임처럼 도우미 하는 것도 늘어날 거고.

결국 이 일이 여기저기 다 갈취당하다가 끝나는 일이라는 것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알아야 하는데, 막상 어린 애들은 모르니까 이런 단체를 찾지 않고, 시간이 지나서야 이런 곳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그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세요?”

 

진희 씨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1주일에 한 번씩 현장(유흥가)에 나간다고 했다. 성매매여성들에게 안내문도 돌리고, 기초적인 법률 지식도 알려주고, 상담센터의 전화번호도 가르쳐주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고 했다. 그것이 그녀가 세상의 이중성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들을, 이 생활에 빠져들도록 유혹해 놓고는 뒤에서는 손가락질하는 이중성이 싫다고 했다. 아무리 쉬지 않고 이 일을 해도 결국에는 ‘다 갈취당하는 구조’를 이 어린 애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비록 그 애들은 아직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말이다.

 

당사자활동가 김진희 씨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 공부였다. 세상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방법을 가르친 것도 공부였다. 공부가 왜 그토록 필요했었는지를 오늘처럼 절실하게 들은 날이 얼마나 있었던가. 봄빛 장학금은 그녀의 절실함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고마움을 세상을 향해 갚고 있었다.

 

재봉틀 돌아가는 ‘드르륵’ 소리가 평화롭게 들렸다. 머리를 맞대어 바느질에 골몰하는 모습도 평화로웠다. 오늘 이들이 누리는 이 평화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한 사람이 고통 중에 홀로 극복해내던 눈물의 시간, 그 사람에게 손 내밀고 기꺼이 도와준 사람들의 따뜻한 시간, 인격을 존중하는 돈으로 후원해준 사람들의 속 깊은 시간, 그런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진정한 평화의 시간 아닌가 말이다.

 

 

 

 

정영훈 (작가)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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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문화기획자이자 생산자로 자라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를 만들어 함께 성장하고 있는 이주여성들이 그들입니다. '2014 희망날개' 프로젝트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나답게’ ‘우리 함께’ 자라나고 있는 그들의 활동과 성장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리는 같이하면 하나입니다”

다문화여성커뮤니티 지원프로젝트 <희망날개> 윙크페스티


지난 10월 26일, 다문화여성커뮤니티 지원프로젝트 <희망날개>에서 선보이는 윙크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나루아트센터를 찾았다. <희망날개>프로젝트는 다문화여성이 문화생산자로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과 한국여성재단이 함께 다문화여성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공연장 건물 전면을 덮은 대형 현수막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하얀 바탕에 다채로운 빛깔의 선들이 그물처럼 교차하고 있어 마치 아름다운 조각보를 보는 듯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각각의 선은 수많은 그림들로 이어져 있다. 하나하나의 그림은 꽃을 그린 것인데,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다른 모양과 색깔의 그림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독특한 무늬가 되었다.


이번 페스티벌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와 상영을 하는 섹션과 다문화여성들의 음식과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섹션, 그리고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섹션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당당한 얼굴의 그녀들이 밝게 인사한다.




“우리의 이야기, 모두가 연결되어 있어요”

전시 및 상영, 참여프로그램




공연장 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2, 3층 로비에는 개별 커뮤니티가 전시 및 체험 부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2층에 들어서는데 한편에서 연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 스팸문자를 보고 남편을 바람핀다고 오해한 적이 있어요. 

다들 같은 일로 부부싸움을 하네요.” 

언어가 달라 생긴 오해를 소재로 한 ‘스팸’이라는 제목의 짧은 영화를 함께 보고 있던 부스였다. 


<미디어자조모임>에서는 지난 1년 간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뮤직비디오 등을 만들었다. 영상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다문화가족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 좋았고, 단편영화를 찍으면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어 즐거웠다고. 

“언어나 문화가 달라서 생기는 오해가 많아요.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고 싶어요.” 

이지니 감독 (필리핀)은 자녀들이 겪는 왕따 문제, 언어로 인해 생겼던 오해와 갈등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담아 보고 싶다고 했다.




텃밭을 가꾸며 지역 내 다문화 감수성을 키워나가고 있는 <이주여성자조모임 수다모임>은 벽면을 가득 채운 글과 사진으로 자신들의 지난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공부모임 <좌충우돌길찾기>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다문화여성 활동가들이 바쁜 일상 틈틈이 자신들의 역량강화를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비영리활동가로 살면서 업무에 지쳐있는 마음을 쉴 수 있는 예술치료와 단단한 마음을 만드는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커뮤니티 소개를 듣고 지나가려는데, 활동가 보얀뗄게르 씨 (몽골)가 붙잡는다. 이주여성인권을 위한 서명을 하고 가란다. 윙크페스티벌 역시 자신들 활동의 연장으로 보는 적극적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늘은 정말 잔칫날 같아요.

다문화여성들의 요리와 문화


3층 로비는 더욱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빠른 비트의 아프리카음악이 흐르고 이국적인 향기가 새어나왔다. 이곳에서는 다문화여성들의 요리를 직접 먹어보고, 그들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그들의 옷과 헤어스타일을 따라해 볼 수 있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커뮤니티가 고향의 음식을 테이블 가득 차려놓았다. 테이블 앞으로 색다른 음식을 맛보려는 참가자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 그 줄을 따라가 보니 화려한 무늬의 옷과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난민 여성들의 커뮤니티 <맘쉐프>의 부스. <맘쉐프>는 아프리카의 음식을 선보이는 한편, 그 옆에 작게 ‘Salon’을 열어 아프리카여성들처럼 머리카락을 땋아주는 체험 부스를 진행했다. 밋밋했던 청년의 헤어스타일이 순식간에 아프리카 풍으로 변신했다. 머리를 땋고 아프리카 요리를 먹으며 신나는 음악을 들으니 절로 흥이 돋는다.


커뮤니티 <말하는 도시락>은 ‘요리로 문화를 소통하자’라는 모토를 가지고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활동을 해왔는데 그간 선보였던 음식들을 이번 페스티벌 참가자들과도 나누기 위해 행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레샤 씨 (스리랑카)는 참가자들이 음식을 덜 때마다 눈을 맞추며 음식의 맛을 설명하고 재료를 알려준다. 음식 하나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 만두와 꼭 닮은 ‘주차이허즈’는 고기와 새우, 부추로 속을 만들어 한국사람 입맛에도 딱이다. “오늘 아침에는 정말 긴장했어요. 하지만 그릇이 비어져 가니까 정말 기뻐요.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하는 게 신기해요” 요리하느라 아침부터 분주했을 텐데 이레샤 씨는 여전히 기운이 넘친다.




“우리 엄마 최고에요”

노래와 연주, 그리고 춤


두 시간여에 걸쳐 전시와 체험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마무리 될 즈음 공연장 문이 열렸다. 드디어 지난 수개월간 갈고 닦았던 그녀들의 무대를 확인할 시간이다. 이번 윙크페스티벌에서는 총 11개의 팀이 무대에 올랐다.


각국의 전통 춤과 전통 악기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귀한 무대들이 이어졌다.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경사진과 베트남 음악을 배경으로 전통춤을 선보인 <반마이베트남공연팀>, 베트남 전통 모자를 이용한 춤은 마치 한국의 부채춤을 보는 것 같다. 아시아 각국의 악기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낸 <팽려영의 아시아 음악여행>, 몽골의 전통춤과 악기를 선보인 <주한몽골여성회 까마를>, 필리핀의 전통 대나무춤과 댄스를 믹스해 열정의 무대를 선보인 <펄오브오리엔트>. 관객석에 있던 한 아이가 “우리 엄마에요!”라고 무대 위를 가리키며 연신 환호를 보낸다.



다양한 국적의 다문화여성들로 구성된 커뮤니티들은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밴드나 난타, 판토마임 등의 공연을 준비했다. 무주에서 올라온 <다문화밴드 레인보우>, 깜찍한 개량한복을 입고 드럼과 베이스, 전자기타를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그녀들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달타령’으로 흥을 돋우다가, 두 번째 곡 ‘여행을 떠나요’에서는 관객을 좌지우지하는 무대매너를 보여주었다. 문화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몸으로 표현하여 마음 치유하는 과정을 판토마임으로 선보인 <한마음회>,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몰입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올해 신규 지원을 받은 <아름다운연대>는 자신들이 직접 개사해서 부른 노래에 맞춰 준비한 수화공연이 인상적이다. 




<다울림><커뮤니티파이팅 대한민국파이팅!>, <두드림아모레>는 난타공연을 준비했는데 의상이나 구성에서 볼 때 비슷하면서도 모두가 다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각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다문화합창단 행복메아리>팀이 부른 넬라판타지아는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었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자 사회자는 공연 팀 전체를 무대 위로 호명했다. 각자의 커뮤니티는 하나가 되어 관객들의 환호에 답했고 관객석에 있던 가족들은 무대 위 엄마를 자랑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축제는 그렇게 서로를 얼싸안고 사진을 찍으며 마무리 되었다. 그녀들은 무대 위에서 지난 일 년의 시간을 우리에게 전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그녀들 모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났다. 문화생산자로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확인했던 2시간이었다.



이번 윙크페스티벌에는 다문화가족의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 축제를 함께 기획한 성공회대문화대학원의 김성진 씨는 이런 생생한 이야기가 더욱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문화여성을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야기로 기억했으면 한다고. 그래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게 될 거라고.


한국여성재단 담당자에게 현수막의 무늬에 대해 물었다. 

“씨실과 날실을 표현한 거예요. 다문화여성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이어서 만들었어요. 서로의 마음과 실천을 한 줄 한 줄 엮어서 보다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 내자는 의미에요. 그럼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겠죠?”(웃음)




홍세미      기록하는 사람. 여자와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다. 

              할머니들과의 수다와 낯선 골목을 좋아한다.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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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문화기획자이자 생산자로 자라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를 만들어 함께 성장하고 있는 이주여성들이 그들입니다. '2014 희망날개' 프로젝트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나답게’ ‘우리 함께’ 자라나고 있는 그들의 활동과 성장 이야기를 전합니다.

 


 내 마음 속 이야기 영상에 펼친다

안산미디어자조모임

문화다양성을 위한 다문화여성 문화커뮤니티 지원희망날개'



경기도 안산시 안산다문화가족지원센터 1층 동아리실. 올해로 세 번째 희망날개의 지원을 받는 영상제작커뮤니티 안산미디어자조모임은 회원들의 커다란 웃음과 목소리로 왁자지껄하다. 10월에 있을 윙크페스티벌 상영을 목표로 제작 중인 10분짜리 영화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힌 상태지만 걱정은 없다.

2009년 결혼이주여성 13명이 함께 시작하여 지금은 필리핀 출신 여덟 회원이 시나리오 작업부터 촬영, 편집까지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동안,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해보고, 또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 결국 해낼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scene #1  활달하고 적극적인 우리에겐 영상작업이 딱이에요


“영상물을 제작하려면 서로 배우가 되어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해요.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이 어울린다는 데 저희가 딱 그렇거든요.” 

결혼 이주 14년째로 올해 리더를 맡고 있는 지니 씨의 설명이다.

회원 중 일곱이 영어강사로 일하면서 기타도 배우고 복지관이나 노인회관 행사 때 민속춤 공연도 한다.

“공연을 위해서는 정해진 음악에 맞춰 정해진 동작을 계속해서 연습해요. 그런데 영상은 좀 달라요. 서로 다른 생각이 많이 나와요. 생각을 모아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요. 하다가도 계획한 것과 다르면 다시 해요. 그래도 안 되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요.” 

그래서 영상은 패션(passion), 열정이 많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 ‘영상제작’은 어려운 작업처럼 보여요.

- 지니 : 처음엔 저도 아이들 외할머니께 보여드리려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부터 했어요. 모임을 시작하고는 영상 공부에 푹 빠졌어요. ‘밥’하는 것도 찍고 장난하는 아이들도 찍고. 어떨 땐 놀러 가는 건지 사진을 찍으러 가는 건지. 중독 같아요.(웃음) 작년엔 같은 회원인 아나벨레 씨에게 리마인드웨딩 동영상을 만들어 선물했어요.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요.





scene #2  의미있는 주제도 다뤄보고 싶어요


그동안 안산미디어자조모임에서는 ‘나의 첫 김치’ ‘내가 한국에서 사는 이유’ 등 단편영화를 여성영화제에 출품했다. 작년엔 가족 이야기를 춤과 노래로 만들어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올해는 이주여성의 자녀들이 학교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뜻을 모으고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영화를 제작중인 김은석 감독은 안산미디어자조모임의 촬영과 편집 실력이 무척 훌륭하다며 “따돌림에 관해 엄마가 묻고 아이가 답하는 장면은 이주민남성들과의 작업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며 놀라워한다.


>> 여름내 찍은 자녀들과의 인터뷰영상은 어땠어요?

- 김은석 : 보는 내내 뭉클하기도 하고 마음 아팠어요. 따돌림이나 놀림의 문제는 이주민 자녀뿐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이잖아요. 촬영한 그대로를 보여준다면 그 진정성으로 인해 정말 울림이 클 거예요. 하지만 공개후의 신상문제 등을 고려, 현실적으로 적절한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scene #3  가슴 먹먹한 아이들 이야기


처음 인터뷰촬영에 흔쾌히 동의했던 아이들도 막상 시작되자 답답하고 억울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이 격해졌고 엄마회원들은 마음의 동요를 숨겨야 했다. 결혼이주 14년째로 현재 다문화센터에서 통번역 담당자로 일하는 지원 씨가 그날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 가족은 성당엘 다니는데 올 초 신부님이 저를 불러서는 큰 애가 화를 잘 참지 못하는지 물으시는 거예요. 성당 공부방에서 어떤 애를 때렸다면서요. 정말 많이 놀랐어요. 왜 때렸는지 물어도 대답 안했어요, 그때는.”

지원 씨는 이번 촬영을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날 한국남자아이 하나가 다문화여자아이에게 “야! 너네 엄마, 아프리카냐? 너 곱슬머리에, 얼굴은 왜 새카매?” 라고 놀렸단다. 여자아이는 놀라서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지원 씨 아이는 “여자아이 엄마도 필리핀 사람이고 내 엄마도 필리핀 사람이고 그건 내 엄마를 욕하는 거니까” 못 참았다며 죄송해했다. 촬영하는 내내 지니 씨도, 다른 아이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 촬영이 끝나고 나서 아이는 뭐라던가요?

- 지원 : ‘엄마, 오늘 시원했어.’라고 했어요. 마음속에 있었던 게 많았나 봐요. ‘시.원.했.어.’ 그 말이 며칠이고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예요. 남편은 그 날 아이에게 ‘괜찮아. 잘했어. 그렇게 해야지’라고 했지만 저는 아니에요. 그래도 참으라고 했어요.




scene #4  영상도 공연처럼 무대에 올리면 어때요?


9월 25일엔 잠시 서울 나들이. 아침 일찍 지니 씨를 비롯한 일곱명은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 걸려 홍대 거리에 도착했다. 그날 시작하는 또다른 이주민문화예술제에 걸린 자신들의 조각보 타일벽화를 보기 위해서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참 열심인 우리죠? 하하하“



오후엔 한국여성재단 세미나실 문화기획자과정 하반기 워크숍. 10월 26일에 있을 여성이주민의 축제 윙크페스티벌을 준비하는 마지막 자리.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하며 페스티벌 공연시간 조율하랴 체험부스 운영상황 점검하랴 다들 분주했다. 경연이 아닌 참여에 방점을 두고 콘서트와 문화해설도 곁들일 예정이란다. 안산다문화가족지원센터 자조모임담당자 류수자씨와 지니 씨는 “작년엔 부스에서 상영했지만 올해는 무대에 올려 다 같이 보면 더 감동적이겠다”며 눈을 반짝인다.


>> 매번 느끼지만 문화기획자 과정에 참석한 사람들은 목소리가 활기차고 정말로 적극적이에요. 리더들이라 그런가 봐요.

- 류수자 : 개개인이 활동적일 수 있지만 어디에서나 그렇지는 않겠지요. 특별히 활기차고 자기표현에 적극적인 건, 이곳에 대한 신뢰 때문 아닐까요?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감. 저희 센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 신뢰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죠.




scene #5  역할에 어울리는 인형연기자가 필요해요


그날 저녁 재단에서 준비한 맛난 식사를 안타깝게 뒤로 한 채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인형공연 협동조합. 여기서 지니 씨와 류수자씨와 김 감독은 인터뷰 영상을 대신할 ‘인형연기자’를 찾기로 했다.


앞서 회원들의 영어강사 경험을 살려 손가락인형과 종이컵인형으로 촬영해 보고는 커다란 스크린에는 큰 인형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었는데 딱 맞는 인형연기자는 쉬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체제작하기로 했다. 전체적으로 큼지막하게, 팔다리 관절부분은 분리하여, 각각의 얼굴은 배역에 맞춰 엄마가 만들기로 한다. 그래야 감정이 얹힐 거라면서.


>> 봉제인형을 만드는 것 뿐 아니라 ‘액팅’도 배워야 한다면서요?

- 지니 : 인형 팔다리에 줄을 연결해서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녹음된 아이들 목소리에, 머리를 긁는다거나 머뭇거리고 답답한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이던 모습을 영상에 옮기려면 인형도 연기를 해야 한대요. 새로운 도전이에요.




scene #6   마음 속 이야기를 보여주는 건 멋진 일이에요


10월 첫 주 연휴 안산미디어자조모임에선 재봉틀 여러 대가 몹시 바쁘게 돌아갔다. 주인공인형 몸체도 실팍하게 만들고 팔다리도 이어 붙였다. 눈코입도 정성껏 완성했다. 아직도 인형연기에 촬영, 편집하는 일이 빠듯하다.

영상이 다 완성되면 어떤 기분일까? 지니 씨는 환하게 웃는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계속 생겨서 힘들지만, 신나요. 밥 먹다가도 생각하고 길 가다가도 생각해요. 우리 아이들에게 얼른 보여주고 싶고 윙크페스티벌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요. 마음 속 이야기를 영상으로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잖아요. 정말 기대돼요.”


시작할 때의 낯섦을 묵묵히 헤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활동이, 삶이, 이미 한편의 영화처럼 감동적이다.





 

조미환  줌마네 글쓰는 이로 인터뷰모임집 <뜨거운 만남>에 필진으로 참여, 글쓰기 수련중이다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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